지난 2일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공업고등학교. ‘목재 가공 실습실’에서 한옥건축과 1학년생들이 ‘좌식 책상’을 만들고 있었다. 한옥의 주재료인 목재를 활용한 기초 실습 시간이다.
이 학과 1학년생 14명은 모두 베트남인이다. 원래 한국에서 살던 다문화 학생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올해 한국 유학을 온 것이다. 정우천 교사가 책상 상판과 다리를 결합하기 위해 전동 드릴로 못을 박을 위치를 알려주자, 학생들이 하나둘 따라 했다. 일부 학생은 교실 한쪽에 서 있던 베트남 출신 통역사에게 중간중간 묻기도 했다.
열심히 드릴로 목재에 구멍을 내던 응옥 후옌(16)양은 “한국 드라마에서 한옥이랑 기와를 자주 봤는데, 이렇게 직접 나무를 만지고 조립하니 신기하다”면서 “한옥 공부를 하고 나면 건축 기업에 취업해 쭉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학교 ‘공학과’ 신입생 14명까지, 올해 전체 신입생 40명 중 28명(70%)이 베트남인이다.
구림공고에 베트남 유학생이 온 건 올해가 처음이다. 1967년 개교 후 지역의 한옥 건축과 조선소 용접 등 현장 인력을 길러 왔는데, 2020년 들어 정원을 다 채우지 못했다. 학생들이 오지 않아 원래 66명이었던 모집 정원을 지난해 36명까지 줄였지만, 신입생은 22명에 그쳤다.
가장 큰 이유는 지역 인구 감소다. 구림공고가 있는 영암군 인구는 2015년 5만8137명에서 올해 5만789명으로 10년 새 12.6%(7348명) 줄었다. 2010년대 후반 심각한 조선업 불황으로 상당수 기업이 문을 닫았고,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 직원들이 목포나 나주 등 상대적으로 생활 여건이 나은 도시로 빠져나간 영향이다.
직업계고가 폐교 위기에 몰리자 전남도교육청이 지난해 ‘직업계고 해외 유학생 유치 사업’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입학 설명회를 열고 학생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구림공고를 비롯해 학생 모집이 어려웠던 목포여상, 완도수산고, 전남생명과학고(강진), 한국말산업고(장흥) 5곳이 올해 첫 외국인 유학생을 받았다. 베트남 35명, 몽골 30명, 쿠바·필리핀·인도네시아 각 4명씩 총 77명이다.
원래 직업계고는 학비와 급식비 모두 교육청과 지자체가 지원하는 무상교육을 한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한국 학생과 똑같이 무상교육을 받는다. 기숙사비는 학교마다 다른데, 구림공고는 전액 학교 예산으로 지원한다. 학생 1명에 3년간 3300만원 정도 들어가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병태 구림공고 교장은 “산업 현장에서는 한국어 능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인력이 필요한데, 고등학교 때부터 데려와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면서 “이들이 지역 기업에 취업해 살게 되면 교육비를 지원한 이상의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적인 한국어 실력을 갖춘 학생을 뽑긴 했지만, 건축·공학 전공 용어들이 많아 수업 속도는 더딘 편이다. 동시 번역 프로그램도 활용하고, 베트남인 통역사가 도움을 준다. 그래도 면학 분위기는 좋다. 장승기 구림공고 교사는 “베트남 현지에서 학업 성취도가 상위 20~30% 수준인 학생들이다 보니 이해가 빠르다”며 “‘건축의 3요소를 쓰라’는 서술형 평가에서 완벽한 답안을 써낸 학생도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한옥건축과에 남학생이 많이 지원할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신입생 14명 가운데 13명이 여학생이었다. 학교 측이 아이들에게 지원 동기를 물어보니 드라마나 웹툰 같은 한류 콘텐츠를 보면서 한국 전통 문화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는 대답이 많았다. 학교 측은 베트남 학생들의 관심사를 반영해 한옥 디자인 같은 수업을 늘릴 예정이다.
‘해외 유학파’ 유입에 힘입어, 학교 측은 내년 신입생 정원을 54명으로 늘렸다. 베트남 학생은 올해보다 8명 늘어난 36명이 입학하기로 했다. 한국 학생(18명)의 두 배다.
목포여상도 몽골 출신 20명, 쿠바 출신 4명을 유치했다. 경쟁률이 5대1에 달했다. 특히 ‘한류 인기’에 힘입어 웹툰 창작과 캐릭터 디자인을 배우는 ‘AI콘텐츠과’가 인기였다고 한다. 박순영 목포여상 교감은 “몽골, 쿠바 현지에서 ‘다음 신입생은 몇 명 뽑느냐’고 계속 문의가 올 정도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출신 국가 특성을 살려 유학 온 경우도 있다. 완도수산고에는 해양 문화권인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학생이 8명 입학했고, 한국말산업고에는 말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 몽골에서 10명이 유학 왔다.
전남에 앞서 경북교육청은 지난해부터 외국인 학생 117명을 선발해 가르치고 있고, 강원과 충남도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역 교육계는 유학생들이 고교 졸업 후 지역에 머물 수 있게 하려면 비자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현재 이들은 ‘고교 이하 유학 비자’로 입국한 상태여서, 한국에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한다. 졸업 후 본국에 돌아갔다가 취업 비자를 받고 다시 입국해야 한다.
전남교육청 관계자는 “지역 고교 졸업 후 취업과 함께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지역 특화형 비자’가 필요하다고 법무부에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출처 : 조선일보>